우리의 문화와역사/문화재 및 국보

왕릉

고양도깨비 2006. 12. 15. 19:54
왕 릉 (王 陵)

1. 왕릉과 고분
고분은 고대인의 무덤을 가리키는데, 무덤의 형태나 크기 또는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한다. 무덤의 크기가 비교적 작으면서 무덤의 주인공이 왕이 아닐 경우 '○○○묘(墓)'라고 부른 다. 비교적 크기가 큰 대형 묘로 주인을 밝힐 수 없는 무덤은 '총 (塚)'이라 하고, 묻힌 사람의 신분이 왕으로 밝혀진 무덤의 경우는 '능(陵)'이라 한다.

2. 왕실의 묘를 부르는 명칭 - 위계에 따라 정함.
1) 능(陵) :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의 사친(私親), 왕세자와 그 비(妃)의 무덤
3) 묘(墓) : 대군·공주·옹주·후궁·귀인 등의 무덤

3. 능의 형식(그림 1,2,3,4)
1) 단릉(單陵) : 왕이나 왕비 중 어느 한 사람만을 매장하여 봉분이 하나인능.
2) 쌍릉(雙陵) :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매장하여 봉분이 나 란이 2기로 조성된 능.
3) 삼연릉(三連陵) : 왕·왕비·계비 등 세명의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능
4)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좌우 두 언 덕에 각기 한 기씩 조성한 능
5) 합장릉(合葬陵) : 왕과 왕비의 관을 함께 매장하여 한개의 조성 한 능.

3. 왕릉의 조성 절차
왕실에서 국상을 당하면 곧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 의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장례준비를 하게 된다.
빈전도감은 장례일까지 염습(죽은 이의 몸을 씻긴 후에 옷을 입히 는 일)· 성빈(成殯 : 빈소를 만듬)·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상복을 처음 입는 일) 등 빈전에 관한 일을 맡고, 국장도감에서는 장의에 필요한 재궁(梓宮 : 무덤을 지키려고 그 옆에 지은 집)·거여(車輿)·책보(冊寶 : 玉冊과 金寶)·복완(服玩)·능지(陵誌)·명 기(明器 : 장사 지낼 때에 무덤에 묻는 여러 기물)·길흉(吉凶)·의장(儀仗 : 의식에 쓰이는 무기나 물건)·포연(鋪筵)·제기(際器)· 제전(際箋 : 의식을 갖춘 제사와 의식을 갖추지 않은 제사의 총칭)·반우(返虞 : 장사 지낸 후 신주를 모셔 돌아오는 일) 등의 의식과 절차를 관장했다. 그리고 산릉도감에서는 현궁(玄宮 : 임금의 관을 묻은 무덤구덩이속 壙中)과 정자각(丁字閣)·비각(碑閣)·재실(齋 室) 등 봉분조성과 부대시설에 관한 일을 맡았다.
택지(擇地)와 능역(陵役)은 대략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렸으며, 능역에 동원된 인원은 인원은 6,000명 9,000명이라고 기록에 전한다.

4. 능의 구조
조선왕조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태조의 건원릉의 배치 방식을 따랐 다(그림 1). 이를 정형화시켜 놓은 것이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議)>이다. 이 전범에서 예외는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의 고종의 홍릉(洪陵 : 그림 2)과 순종의 유릉(裕陵)이다. 홍릉과 유릉은 명나라 태조 효릉의 양식을 따라 조성한 황제의 능이어서 왕릉들과 는 다르게 정자각이 일자집 침전(寢殿)으로 변하고, 봉분 주위에 배치했던 문·무인석도 침전 앞으로 옮겼다. 석물도 신도 앙쪽에 금관 조복을 한 문인석과 투구에 흉갑을 두른 무인석을 위시하여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 석상을 배치하였다.
건원릉의 형식은 중국의 성왕(城王)의 무덤 형식이다. 무척 웅장하 지만 황제의 능에는 못 미친다. 감히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황제의 능과 맞먹을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때 몽고의 지배 아래서는 이런 왕릉의 형식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으며 고려 말에 자주국가를 선언한 공민황 때에 이르러 비슷한 형태가 갖춰졌다.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의 현릉과 정릉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 며, 고려왕릉에 영향을 준 신라왕릉의 병풍석 역시 능침을 보호하기위하여 큼직믐직한 자연석을 능침둘레 군데군데 박아 놓은 고구려왕 릉의 호석(護石)제도를 이어받은 제도이다. 자연석으로 된 보호석이 점차 네모지게 다듬은 입석(立石)으로 변하였을 뿐이다. 또 왕릉 양 편에 문인석과 무인석을 위시하여 석마(石馬)·석양(石羊)·석호(石虎)를 분배하여 벌여놓고 병풍석에 12지신상을 입체조각한 형식은 신 라시대에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이룩한 고유한 제도가 그대로 고려조로 전승된 법식인 것이다.

그럼 건원릉을 중심으로 능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자.(그림 1, 2)

1) 택지(擇地)
풍수지리설에 따라 배산임수(背山臨水)한 지형에 영험한 맥이 흐르 다가 멈추는 곳인 명당을 잡았다. 즉, 북쪽의 놓은 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좌우에 청룡·백호의 산세, 남쪽에 안산(案山), 묘역 안에 천 (川)이 있어 물이 동쪽으로 흘러 모아지는 곳을 말한다. 묘역 안의 명당에 지맥이 닿아 생기가 집중되는 곳을 혈(穴)이라고 하는데, 이 혈에 관을 묻고 봉분을 조성했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한다. 좌란 혈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이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남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세에 따라 서향 또는 북향을 취한 것도 있기도 하다.

2) 곡장(曲墻)
능의 뒤쪽에는 배산(背山)이 있고 송림(松林)을 배경으로 하여 경사지 밑부분에 동·서·북 3면으로 곡장(曲墻)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었다.

3) 봉분(封墳),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봉분 밑부분은 12각의 병풍석을 둘러 보호했다. 병풍석의 중앙 면석에 12방위를 담당하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위에 맞게 양각했는데 이는 모든 방위의 외침으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방위 표시를 위하여 병풍석 위에 꽃봉우리 모양의 인석을 만들기도 한다.
난간석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망주석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을 석주(石柱), 그 사이를 가로 질러 접근을 막는 횡석주를 죽석(竹石), 죽석의 중간에 받쳐준 작은 기둥을 동자석주(童子石柱)라한다.

* 능묘 주위에 석조물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 전한시대에 시작된 것으로현존하는 최고의 작품은 전한 무제 때의 명장이었던 곽거병의 묘 앞의 조각들로 알려져 있다.

* 봉분의 호석과 그 호석에 부조된 무복(武服)의 십이지신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산물.

4)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각각 4기가 밖을 향하여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추존릉의 경우 그 수를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등을 두었다.
한편, 공민왕 이전의 고려왕릉은 봉분 아래를 흙으로 높이 쌓지 않고 대신 봉분까지 돌계단을 놓았으며 능을 지키는 짐승이 석양과 석
호가 아니라 석구(石狗) 한 종류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통일신라와 고려시기 석양과 석호 대신 석사자가 봉분 주위에 배치되었다)

5)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 상석 아래에는 귀면(鬼面) 모양을 새긴 고석(鼓石)이 상석을 받치고 있다. 상석을 다른 말로 혼유석(魂遊石)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임금의 혼이 나와서 노는 돌이라는 뜻이다. 건원릉의 고석은 5개인데 세종의 영릉부터 4개만을 만들어 놓다가 휘릉에 와서 다시 5개를 설치하기도 했다. 왕릉의 상석과 일반묘의 상석은 형태는 같으나 그 기능은 다르다. 일반인의 뫼는 봉분 바로 앞에서 상석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은 봉분 앞이 아니라 봉분이 올라 잇는 구릉 저편 밑의 정자각 앞에서 제사를 올린다. 그러면 죽은 임금은 혼유석 위에 앉아 저 아래에서 치러지는 제사를 지켜보는 것이다.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망주석은 가운데 구멍이 나있어 이곳에 줄을 걸고 차양을 씌워 혼유석을 가리게 되어 있다. 다람쥐나 이무기를 새겨 놓은 망주석도 있다.
장명등은 망주석과 망주석보다 한 단 아래에 있는데 최기에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가 차츰 사각형 지붕으로 변화한다.

6) 문인석과 무인석·석마
봉분 앞 평지는 3층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맨 위층에는 혼유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중간층에는 장명등을 중심으로 문인석 한쌍이 석마(石馬)를 대동한 채 시립하고 있다. 문인석은 자신의 품계를 나타내는 홀(笏)을 들고 있다. 맨 아래층에는 무인석 한쌍이 석마를 대동한채 서있다. 무인석은 장검을 빼어 두손으로 짚고 있다.

왕릉답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는 문인석, 무인석들은 왕의 일생을 드러내듯 저마다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태조의 건원릉의 경우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 어깨를 쭉 펴고 목을 세운 채 서 있는 자세가 당당하고 표정도 의연하다.(위엄있는 표정) 반면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릉의 석상은 아예 엉엉 울고 있다. 선조의 목릉의 경우도 우는 듯한 모습이다. 표정이 모두 다르다 해도 왕릉이니만큼 대체로 근엄함과 권위를 지니고 있는데 드물게 환히 웃고 있는 석상이 있다. 영조의 원릉의 문·무인석은 왕을 호위하고 있는 신하로서 '체신머리 없이' 입아귀가 위로 쭉 올라갈 정도로 기분좋게 웃고 있다. 체구도 아담해 실제 몸 크기와 동일하다.

* 통일신라시대에 서역인을 모델로 삼은 무석인은 당시 서역과의 밀접한 교류관게 를 보여주고 있다.
* 문석인과 석사자의 조각양식이 당나라의 양식을 반영.

7) 사초지(莎草地)·정자각(丁字閣)·석함(石函)·비각(碑閣)·수복청(守僕廳)
1> 사초지 - 무인석에서 정자각까지 심하게 경사가 진 언덕.
2> 정자각 - 丁자 모양을 한 제향을 하는 건물이다. 정자각에 오르는 층계는 동쪽과 서쪽에 있다. 이는 제례의식에서 동입서출(東入西出)의 격식을 지키기 위한 뜻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러한 격식은 잘 지켜지지 않고, 기단 정면에 계단이 설치되기도 한다.
3> 석함 - 정자각 서쪽에 있다. '예감'또는 소대(燒臺)라고 불리며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네모난 돌상자이다.
4> 비각 -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지은 건물.
5> 수복청 -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를 비롯한 일꾼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

8) 참도(參道)와 홍살문(紅箭門)·판위(版位)·금교(禁橋)·재실
1> 참도 -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다. 참도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 오른쪽 부 분은 단을 낮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정령(精靈)이 다니는 왼쪽 신로 (神路) 부분과 사람이 걸어가는 오른쪽 인로(人路) 부분을 분리해 놓은 것입 니다
2> 홍살문 -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문.
3> 판위 -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임금이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배위에서 절을 하고 들어갔다.
4> 금교
5> 재실 - 능을 수호하는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

9) 원찰(願刹)
왕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일컫는다. 고려시대 성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으나 태종은 배불숭유정책에 따라 원찰을 세우지 않았으며 정조는 원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이를 금지했다. 건원릉의 개경사, 정릉의 흥천사, 광릉의 봉선사 등이 대표적이다.


<참고자료>

1. <왕릉>(한국문원, 1995)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3. <한국미술문화의 이해>(김원룡·안휘준, 예경, 1994)
4. <한겨레 신문> 역사기행 14 ∼ 15 ---조선의 왕릉 1-2
5. <중앙일보> 1995년 10월 24일, 47면 문화면 기사.




* 동구릉 (東九陵)

서울 동북쪽의 동구릉(東九陵)과 홍유릉, 서쪽 고개 너머 서오릉(西五陵)등 수도권 일원에는 조선왕조 오백년이 잠들고 있다. 그중에도 조선왕조9명의 왕과 17명의 왕비.왕후가 잠들어 있는곳이 동구릉이다.
1408년 조선역사의 문을 연 태조가 건원릉에 터잡아 누우면서 조선왕조의 왕릉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여기를 동구릉이라 부른것은 1849년 헌종의 경릉이 아홉번째로 들어서면서부터이고,그전에는 능이 늘어나는 대로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렀다.
동구릉은 전체 능역이 59만여평에 달해 그 광활한 대지와 숲만도 장관이다. 숲이 울창해 삼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고,학생들 소풍장소로 역사공부의 현장으로도 제격이다.

9릉은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顯陵),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崇陵),제20대경종비 단의왕후가 묻힌 혜릉(蕙陵),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元陵),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경릉(景陵),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綏陵)이다.

동구릉의 터는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한양 가까운 곳에 길지를 물색하던 검교참찬의정부사(儉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추천해 하륜(河崙)이 나가보고 능지로 택정했다고 전하는 한편,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에게 부탁해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적당한 택지를 정해두었다고도 전해온다.
한양으로 천도해온 조선 태조는 생전에,고려왕릉이 대개 개성 부근의 산악지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왕릉의 참배도 불편하거니와 왕릉 수호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태조는 자신과 후손들의 유택(幽宅)을 한양 가까운 곳에 정하고자 고심했는데, 어느 날 망우리 고개에 올라 동구릉을 바라보니 왕릉의 군락지로 더없는 길지(吉地)더란다.짐작컨대 이때 이성계 옆에는 분명 무학대사가 있었을 법하다.

북한정맥의 정혈(正穴)에 해당한다는 건원릉은 좌우에 용과 호랑이가 호위하고 있으며 용은 멀리 태백산에 닿아있고 조산(組山)은 백운산,주산(主山)은 검암산이다. 그 형세가 완벽하진 않지만 지세는 가히 다른 왕릉을 압도할 만큼 장하여 후대에 융성한 기운을 일으킬 만하다고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죽어서도 오백년 왕조의 후손들을 줄줄이 거느리게 되었고,유택에 대한 근심을 잊게 된 곳이라 하여 망우리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태종 때 건원릉을 둘러본 명나라 사신들은 산세의 뛰어남에 "어찌 이런 하늘이 만든 땅덩이가 있단 말인가. 이는 필시 인간이 만든 산임에 분명하다"고 감탄했다 한다.

동구릉에 들어서서 직선거리의 맨 위쪽(북쪽) 깊숙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자리잡고 있고,그 정면 멀찍이에 홍살문을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성역이니 악귀는 아예 범접하지 말라는 표시다. 오른쪽으로 묘내수가 흐른다.묘에 물이 찬다면 명당도 아니거니와 자손에게 화가 미칠 징조이다.묘내수가 얼마나 잘 빠지느냐는 그래서 중요하다.

왕이 능으로 오르는 길을 참도라 한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거쳐 직선으로 들어가면 제를 올리는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왼쪽으론 다른능에서는 볼 수 없는 작은 석물이 놓여있다. 기단과 중대석이 갖춰져 있으며 위가 편편한 아담한 석물이다. 능에서 임금이 제향뒤 축문을 태워 묻는 망료위(望燎位,소전대라고도 부른다)로 예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자각 남쪽으론 제의 준비를 행하는 수복청이 3칸짜리 집으로 마련돼 있어 역시 태조릉이구나 싶다. 애당초엔 왕릉마다 있었을 이 수복청은 현재 거의 사라지고 잘해야 주춧돌만 남아 그 흔적을 말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수복청 옆에 용무늬비머리가 얹어진 태조의 신도비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대부의 묘에는 종종 신도비를 세웠지만 왕릉의 경우에는 건원릉의 태조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가 전부인 희귀한 예이다.

건원릉은 우선 규모가 넉넉하고 앞이 시원스레 트여 대범하고 편안하면서 아늑한 위치에 들어앉아 있다. 좌우를 살펴보면 아하! 명당이란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왼쪽의 청룡과 오른쪽의 백호가 등줄기를 세워 흐르고, 앞산과 그 뒤 한강 너머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이 아득하며,능원아래 정자각 좌우에는 묘내수가 모여 흐르는 시내가 있다. 이런 형국을 지관들은 맹호출림형이라 부른단다. 또다른 형국으로 꼼꼼히 따져보면 장군이 천막 안에서 쉬고 있는 형국도 된다고 한다.

3면이 곡장 안에 봉분을 안치했는데, 봉분은 마치 더벅머리 총각처럼 억새로 덮여 있어 특이하다. 유독 고향을 그리워했던 태조의 생전을 헤아려 억새가 지천인 고향 함흥땅에서 옮겨다가 마지막 옷을 입혀드렸다는 애틋한 사연이 서려있다.
그러나 이야기와는 달리 억새풀 덕분에 봉분은 여느 왕릉보다 더 위엄있어 보인다 태조의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조성된 현정릉(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의 능제를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왕릉의 병풍석은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고 고려왕릉의 호석(護石)제도도 그대로 이어받는다. 다만 돌의 모양,조각의 흐름등이 장인의 솜씨와 안목, 실험정신에 따라 바뀌고 변형되어갈 따름이었다.

봉분 아랫부분에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을 둘렀다. 석난간은 양련으로 돌리고 금강저를 든 수호신이 새겨져 왕과 함께하고 있으며, 12각 면마다 수놓아진 당초 문과 구름문 조각이 화려하다. 봉분 뒤 곡장 안으로는 돌로 만든 호랑이와 양이 호위하고 있고,봉분 앞에는 상석과 화려하고 장식성이 뚜렷한 8각 장명등이 놓였으며,양 옆에 망주석이 있는데 모두 정성이 극진하다. 그 양 옆으로 홀을 들고읍하고 선 문인석과 석마,장검을 빼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인석이 늠름하며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능은 정남에서 약간 서향이다.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왕조 오백년의 능제에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후의 능들은 저마다 솜씨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석물의 배치와 능제는 대부분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조성돼 비슷하다.
건원릉이 내려다볼 수 있는 좌우로 8릉16위가 15유택을 이루고 있는데,그 모양 이 마치 큰 나무의 본줄기가 건원릉이라면 다른 능들은 본줄기에서 곁가지를 치고 나가 꽃망울을 맺은 듯한 형상이라고나 할까.

동구릉 초입에서 건원릉을 오르다 오른쪽에서 처음 만나는 게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의 합작릉인 수릉이다. 봉분 하나에 상석도 하나여서 단릉으로 보기 쉽다. 상설물들은 다른 능과 비슷하나 문인석에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힌 것과 능 앞의 문.무인석이 한단에 서 있는것이 색다르다.

수릉에서 건원릉을 향해 올라가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든 현릉에 닿는다 현릉은 홍살문과 정자각,비각 등은 하나지만 봉분은 하나의 능선을 사이에 두고 각각 조성해 동원이강(同原異岡)형식을 이루었다. 동구릉의 목릉,서오릉의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敬陵),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등이 동원이강 식이다.

현릉의 문종릉은 조선왕조 능에서 병풍석의 방울과 방패무늬가 사라지고 고석이 네 개로 줄어들었으며, 망료위 대신 제향 후에 축문 등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 최초의 능이다. '능제의 검소함'을 주창한 [국조오례의]를 따라 최초로 조영된 능은 옛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지금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세종의 영릉이었으나 영릉이 1469년(예종1년)에 여주로 천장됨에 따라 이곳 문종릉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마련된 가장 오래된 능이 된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경기도 안산에 묻혔다가 1452년 39세로 문종이 승하한 뒤 1513년에야 이곳에 천장되었다.

현릉위로 올라가면 건원릉 동쪽 언덕에 목릉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비각은 하나지만 봉분은 셋이다. 왼쪽은 선조를 두고 가운데에 의인왕후 박씨,오른쪽에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누워있다. 이런 경우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있대서 삼연릉 이라한다.

선조릉은 병풍석에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돼있고,연꽃봉오리 봉긋봉긋 맺은 난간석 기둥도 건원릉 못지않은 형식을 갖췄지만 솜씨가 서툴러 조형미가 떨어진다. 상석받침과 8각장명등도 건원릉을 본떴지만 솜씨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크고 우람할 따름 세련미가 없다. 선조가 경운궁에서 승하한 해는 1608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직후였으나 능역이 정성을 다할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선조릉은 당초 건원릉 서쪽 줄기에 있었는데 심명세(沈命世)가 목릉에 물이 차 불길하다고 주장, 1630년 (인조8) 지금의 자리로 천장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되고 난간석만 둘러서 있다. 이곳의 석물도 솜씨가 없긴 매한가진데,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가 산뜻하고 명랑하다. 왕릉석물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화문(花紋)은 이후 장명등마다 거의 새겨지고 차츰 병풍석으로 확대되는 단초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영창대군 어머니 인목왕후릉의 경우 문.무인석은 여전히 어설프지만 그밖의 석물은 꽤 세련되게 다듬었다.
건원릉 서쪽 바로 아래 휘릉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열다섯 나이에 계비가 되었으며 스물여섯에 남편 인조를 잃고 대비가 되어 효종,현종,숙종대까지 왕실의 어른 조대비로 지냈으나 소생조차 없었다. 인조와 정비인열왕후는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장릉을 두고 1688년 12월 그 외로운 계비장렬왕후만 이곳으로 왔다.

휘릉은 정자각을 마치 회랑을 마련한듯 양 옆으로 1칸씩 더 두고 재실을 세워전체 5칸이나 되게 한 점이 다른 정자각에 비해 독특하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추춧돌이 남아있는데,아마도 수복청이 있던 자리가 아닐까.휘릉은 병풍석없이 난간만 두르고, 난간석 기둥에 12방위를 문자로 새겨두었다.
상석을 괸 굄돌이 5개여서 새로운 변형을 읽는다.건원릉은 5개,세종 영릉 이후에는 4개씩 놓았던 것을 여기서 다시 5개를 놓았으니 단연 형식파괴다. 뿐만 아니라 굄돌에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귀면(鬼面)도 조각돼 있다. 고구려에선 기와에고려와 조선 시대엔 건축이나 주술적인 장식등에 사용되던 귀면이다. 그렇게 능조형의 새 모습이 시도되고 있다. 망주석 기단이 유난히 투박하며,홀을 턱에 바짝 대고있는 문인상 등 후대로 내려오면서 조각에도 점차 권위와 경직성이 배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휘릉 아래로 내려오면 원릉에 닿는데,정자각 오른쪽으로 3칸짜리 비각 안에 3기의 비가 서 있어 내력이 궁금하다. 영조는 생전에 정비 정성왕후 곁에 묻히고자 서오릉의 홍릉에 터를 잡아 두었으나 그 터에 이상이 생겼던지, 이곳 계비 정순왕후와 쌍릉에 잠들어 있다. 원릉은 비교적 터가 넓고 아담한 동산에 등을 기댄채 시원하게 툭트인 앞쪽을 향해 있다.

영조는 부왕 숙종의 명을 근거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펴내 제도를 정비할 만큼 상례와 능제에 관심이 많았고, 허례허식을 줄이고자 애썼다. 따라서 원릉은 영조 자신이 펴낸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조성,왕릉에 적용돼온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석만 두었다. 상석은 각각 놓았고 꽃무늬가 새겨진 4각 장명등은 두 봉분 사이에서 불을 밝힌다. 문.무인석은 밭은 목에다 조각이 썩 잘된 편은 아니 지만 얼굴 가득 피워 문 후덕한 웃음이 돋보인다.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경릉은 동구릉의 아홉번째 능이다. 용세(龍勢)와 혈증(穴證)이 확실하고 열이면 열이 다 좋다는 명당중의 명당이란다. 국상을 당해놓고 길지를 열세 군데나 찾아나선 끝에 이곳을 잡았다니 땅주인의 복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예로부터 음택이든 양택이든 땅이 사람을 고른다고 하던가. 경릉의 전망은 동구릉에서 가장 빼어나다.

왼쪽에 헌종,가운데에 효현왕후,오른쪽에 효정왕후가 잠든 삼연릉이다. 나란히 자리잡은 봉분 셋을 돌난간에 서로 어깨동무를 해 하나로 묶고 있으니 생전의 일이야 어떠했든 의가 좋아 뵌다 할까. 하여튼 파격이다. 무인석의 머리에 두른 띠와 여유로운 표정이 희한하다. 봉분 앞의 석상들 몸에 총이 맞은 듯 구멍이 숭숭뚫려 있는 것도 의아스럽다.

경릉에서 훨씬 내려오면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가 홀로 잠든 혜릉이 있다. 단의왕후는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33세의 나이로 창덕궁 장춘원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홀로 묻히고,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잠들어 있다.

혜릉은 정자각을 새로 짓는 등 최근에 새로 단장했다. 산세 탓일까. 아담한 언덕에 기댄 혜릉은 서쪽에 머리를, 동쪽에 발을 두고 있어 색다르다. 이 무렵에 와서는 석물이 꽤 형식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장난꾸러기가 조성했는지 주먹만한 코에 장승에서나 볼 수 있는 퉁방울 눈, 허옇게 이를 드러낸 국적불명의 무인 상이 혜릉을 지키고 서 있다.

혜릉에 들어가면 효종의 아들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가 나란히 쌍릉에 묻힌 숭릉이 있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이 없이 난간을 둘렀는데, 경릉처럼 두 봉분을 이어 둘렀고, 상석은 각각 따로 놓았다. 장명등과 망주석엔 국화꽃을 비롯해 꽃문양을 면마다 새겨 귀엽다.

동구릉을 돌아보면 사람이 만나는 인연도 묘하지만 죽어 묻히는 인연도 절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로 만나 죽어서도 합장에 드는 인연이 있는가하면, 쌍릉으로 곁에 묻히기도 하고, 왕과 왕비가 서로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외롭게 묻혀 있기도하니 말이다. 살아서는 분명 투기를 벌였을 정비와 계비가 죽어서는 부왕과 왕비,계비 순서로 삼릉을 이뤄 편안히 잠들어 있고, 정비는 멀리 두고 계비와 누워있는
왕도 있다. 동구릉은 사적 193호로 지정돼 있다.



☞☞☞ 조선의 역대 왕 무덤 이름과 소재지 ☜☜☜

1. 태조-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신의왕후 한씨- 제릉(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
신덕왕후 강씨- 정릉(서울 성북구 정릉동)

2. 정종, 정안왕후 김씨- 후릉(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3. 태종, 원경왕후 민씨-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양녕대군묘(서울 동작구 상도동)
효령대군묘(서울 서초구 방배동)

4. 세종, 소헌왕후 심씨- 영릉(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후궁 명빈 김씨- 명빈묘(경기도 구리시 이천동)

5. 문종, 현덕왕후 권씨- 현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 단종- 장릉(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4리)
정순왕후 송씨- 사릉(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사능리)

7. 세조, 정희왕후 윤씨- 광릉(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덕종(의경세자), 소혜왕후 한씨- 경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8. 예종, 안순왕후 한씨- 창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장순왕후 한씨- 공릉(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9. 성종, 계비 정현왕후 윤씨-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
정비 공혜왕후 한씨- 순릉(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10.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 (서울 도봉구 방학동)

11. 중종-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
단경왕후 신씨- 온릉(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장경왕후 윤씨- 희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문정왕후 윤씨-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12. 인종, 인성왕후 박씨- 효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13. 명종, 인순왕후 심씨- 강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덕흥대원군- 덕릉(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14. 선조,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목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원종(정원군,선조의 다섯째아들), 인헌왕후- 장릉(경기도 김포)
원종의 사친 인비 김씨- 순강원(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16. 인조, 인렬왕후 한씨- 장릉(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장렬왕후 조씨- 휘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현세자- 소경원(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소현세자의 빈 강씨- 영회원(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17. 효종, 인선왕후 장씨- 영릉(경기도 여주군 능서리)
후궁 안빈 이씨- 안빈묘(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18. 현종, 명성왕후 김씨- 숭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19. 숙종,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명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인원왕후 김씨- 익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희빈 장씨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후궁 영빈 김씨- 영빈묘(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20. 경종- 의릉(서울 성북구 석관동)
단의왕후 심씨- 혜릉(경기도 양주)
선의왕후 어씨- 의릉(서울 성북구 석관동)

21. 영조, 정순왕후 김씨- 원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정성왕후 서씨- 홍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진종(효장세자, 영조의 맏아들)- 영릉(경기도 파주)
장조(사도세자)- 융릉(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영조의 사친 숙빈 최씨- 소령원(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2. 정조, 효의왕후 김씨- 건릉(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순조의 사친 수빈 박씨- 휘경원(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3. 순조, 순원왕후 김씨- 인릉(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익종(효명세자), 신정왕후 조씨- 수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4. 헌종,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경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5. 철종, 철인왕후 김씨- 예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6. 고종, 명성황후 민씨-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순헌 귀비 엄씨(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 영휘원(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27. 순종,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 유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사친이란 서자의 생모를 말함인데 왕족에서 사친이란 정비가 아닌 빈의 자식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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