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당신의 주머니에 살았던 나는 누구인가? | ||||||||||||||||||||||||||||||||||||||||||||||||||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로 인해 웃고, 나로 인해 울기도 하니 난 대체 인간들의 적일까? 친구일까? 나와 내 친구들이 좋은 뜻으로 모이면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던 아이도 살려내지만, 우리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으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모호한 게 내 정체성이다. 내가 누구냐고? 만원권·오천원권·천원권과 오백원·오십원·십원·오원·일원 동전을 친구로 가진 100원짜리 동전이다. 여기는 커피자판기 속. 평소 차와 밥 인심 좋기로 소문난 회사원 H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던 나와 내 친구들을 탈탈 털어 점심을 함께 한 후배들에게 커피 한 잔씩을 돌렸다. '돌고 도는 돈'이라 했던가? 이제 나는 또 누구의 손에 들어가 어디로 가게 될까. 하지만 지금 잠깐의 휴식시간. 찬찬히 돌아보면 내 생도 참 여러 우여곡절을 지나왔다. 내가 태어난 경산조폐창을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눈물겹고도 가슴 벅찬 일이다. 개도 날 가지면 정승처럼 살 수 있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텐가? 먼저 내 증조 할아버지 이야기다. 한국의 조폐 수준은 세계적... 5개국에 완제품 수출 현대화된 내 최초 조상은 1959년 발행된 백환·오십환·십환 주화다. 원래 나를 포함한 주화와 지폐는 한국조폐공사에서 제조하지만 당시엔 기술력이 모자라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국에서 제조한 것을 수입했었다. 이들 세 조상은 1962년 제3차 통화조치에 의해 통용정지 명령을 받았으니 그 생명은 짧았다. 십원·오원·일원 동전은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난 형들이다. 그들은 출생년도는 1966년. 내 생일은 1970년 11월 30일이다. 이후 1982년에는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학이 새겨진 큼직한 오백원 주화가 우리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이듬해인 1983년에는 내 형제 모두의 도안이 사실적으로 변화되기도 했다. 화종별 통일감을 주기 위한 조처였다. 그렇다면 나와 내 형제들은 뭘로 만들어지는 걸까? 먼저 내 몸은 구리와 니켈의 합금인 백동이다. 500원짜리 역시 나와 원료가 같다. 1원짜리는 알루미늄, 5원과 10원짜리는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으로 만들어졌으며, 50원짜리의 몸에는 구리와 아연, 니켈 등 3종의 금속이 들어간다. 이건 대부분이 알고있는 것이겠지만, 내 몸의 앞면에 새겨진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다. 1원짜리엔 무궁화, 5원엔 거북선, 10원엔 다보탑, 50원엔 벼이삭이 각각 새겨져 있다. 뒷면엔 공히 액면숫자가 양각돼 있다는 것도 다들 알 것이다. 나를 포함한 주화 6형제를 만드는 한국조폐공사의 기술력은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아르헨티나, 필리핀, 인도, 대만, 싱가포르 등 5개국에는 완제품 주화를 수출하고 있으며,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소전(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동전)의 70%가 한국에서 제조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천만개 중 하나 혹은, 일억 개 중 하나가 발견될까말까한 불량품(새겨진 인물이나 조형물이 약간 비뚤어져 있다거나 한 것)이 모 인터넷 경매사이트에 엄청난 고가(1억원)로 올려지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나를 포함해 주화에 관한 한 불량품을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알고보면 10만원 수표보다 10원 동전이 비싸다
돈만이 아니다. 우표와 주권, 채권, 상품권, CD(양도성예금증서) 등 종이에 금액이 적힌 것은 대부분 경산조폐창에서 생산한다. 주민등록증과 공무원신분증, 여권, 동사무소 등에서 사용하는 수입증지 역시 경산조폐창이 만드는 품목들. 이 갖가지 품목들을 만들어 납품하는 원가를 알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은 빙그레 웃게 된다.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의 납품가는 단돈 28원. 10원짜리 동전의 납품가가 38원이니 10만원짜리 수표의 원가는 10원 동전 원가보다 싼 셈이다. 1만원짜리 지폐의 경우는 70원, 나는 75원으로 납품가가 책정돼 있다.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하는 것 중 최고가인 것은 대통령에게 수여하는 무궁화대훈장. 190돈이 넘는 금과 110여돈의 은, 여기에 루비 등의 보석으로 만드는 이 훈장은 순수 재료비만 1300만원이 넘는다. 납품가는 2000만원. 10만원권 자기앞수표를 71만5천여장 만들 수 있는 돈이다. 이제 내 이야기는 잠시 쉬고 당신들이 나, 아니 내 형제와 친구들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들을 답해주는 시간을 가져보자. ① 나와 내 형제인 주화와 지폐에 새겨지고, 그려지는 인물과 조형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는지 궁금하다고? "먼저 한국은행에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소재가 무엇인지 여론조사 등을 실시한다. 이후 원로학자 등으로 구성된 화폐제조자문기구가 적합성을 논의한 후 디자인과 서체 등을 결정해 제작에 들어간다"는 것이 1977년 한국조폐공사에 입사해 같은 직장에서 올해 정년을 맞은 박창식(디자인조각팀 부장)씨의 설명이다. ② 나와 오십원, 오백원짜리 주화의 테두리가 톱니모양인 이유가 뭐냐고? 톱니바퀴형의 둘레는 고대주화가 가지는 특징 중 하나다. 최초의 금속화폐 재료는 금과 은이었다. 불량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 주화들의 테두리를 조금씩 깎아내 위조동전을 만들고 불로소득을 꾀했는데, 톱니형 주화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덧붙여 내 몸에는 110개의 톱니가 새겨져있고, 500원에는 120개가, 50원에는 109개가 새겨져있다. ③ 이제까지 만들어진 나와 내 형제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냐고? 답을 말해주기 전에 일단 '놀라지 마시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싶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주화 6종의 총 개수는 약 160억9646만2천여 개. 이중 나 100원짜리의 개수는 65억개에 육박한다. 매년 나와 5종의 동전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만도 400억원에 이른다. 내 친구 좀 서랍에서 묵히지 말자, 지폐도 괴롭히지 말자 여기서 부탁 하나 하자. 나를 포함한 소액의 동전들이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고 각 가정의 저금통과 책상 서랍 등에 널브러져 건 국가적 손실이다. 이것들을 대신하기 위해 매년 동전을 만들어야 하고, 그 제작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엄청나다. 도소매점과 자동판매기 등에서는 매일 나와 내 형제들을 필요로 한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주화를 쌓아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건 잔돈 계산을 편리하게 해주고, 동전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애국의 길이다. 허니, 동전 쓰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 덧붙이는 당부는 내 친구인 지폐를 깨끗하게 사용해달라는 것이다. 한해 동안 훼손돼 쓰지 못하게 되는 지폐는 9억장. 5톤 트럭 194대를 동원해야만 실을 수 있는 양이다. 이런 형편이기에 동전과 마찬가지로 지폐 생산비용 역시 무시 못할 거액임이 불문가지. 종이가 아닌 100% 면섬유로 만들어진 한국 지폐는 외국에 수출할 정도로 품질이 뛰어난데 그 사용자들인 한국인이 거기에 낙서를 하고, 함부로 구겨서야 되겠는가? 지폐에 인쇄된 세종대왕과 율곡, 퇴계가 더 이상 실망하지 않게 하자. 또 한 가지 당신들이 흥미로워할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150원 동전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답은 '있다'다. 경산조폐창에서만 사용하는 특수한 동전인데 그 크기는 1원짜리보다 조금 작다. 색깔은 황색. 아래 사진에서 내 옆에 함께 포즈를 취한 녀석이다.
특히, 작업현장에서 동전 하나라도 분실될 경우엔 그걸 찾을 때까지 전직원이 퇴근할 수 없다. 이런 철저한 보안시스템 속에서 운용되는 경산조폐창에서는 일반 화폐나 동전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아예 처음부터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150원짜리 동전은 이런 상황 때문에 경산조폐창 내에 설치된 음료자판기용 화폐라고 보면 된다. 나를 포함한 일반동전을 사용할 수 없기에 고안된 아이디어의 산물인 것. 그곳에 설치된 8대의 자판기는 일반 제품과는 다르게 이 동전을 인식할 수 있게 제조됐다. '특수공간의 특수주화'인 것이다. 경산조폐창엔 口口口口口口이 있다?? (답 :150원동전) 마지막으로 나와 내 형제들의 제조공정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말을 마칠까 한다. 한국의 주화는 6가지의 큰 공정을 통해 탄생하는데 그 첫 공정은 디자인 소재, 문양, 크기, 문자, 규격을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디자인 공정.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동전을 찍어낼 틀을 만들어내는 조각과 극인제조 공정이다. 소재와 두께에 맞도록 금속을 용해, 압연해 만든 판을 주화 형태로 절단하는 과정과 열처리-표면처리 과정은 네 번째 공정인 소전제조. 다섯 번째가 틀 속에 소전을 넣어 온전한 동전의 형태로 찍어내는 압인 공정. 압인된 상태와 규격 등 품질을 검사하는 과정을 거치면 최종 단계인 포장에 이르게 된다. 아래는 일련의 공정을 찍은 사진들이다. 긴 이야기가 끝났다. 이제 나는 여기를 나가 단돈 100원짜리 동전 하나일지라도 가치 있는 곳에 의미 있게 써줄 새 주인을 기다려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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